일기<에든버러 일기> 2022

2022/08/04~08/14


<시차적응>

이코노미에 열세 시간 몸을 구겨 넣고 프랑크푸르트에서 경유하느라 하루 쉰다. 겸사 겸사 나온 시내에서 짜가운 소시지에 맥주를 부어 마시면서 형편없는 기내식으로 고팠던 배를 채운다. 졸린 정신 부여잡고 이곳의 시간에 나를 구겨 넣는 밤.







<에딘버러 페스티벌>


동양인은 천 명 중 한 명.


나, 글씨, 김소영


세계적인 무대에서 글씨를 펼쳐보는 것이 꿈이라 말했다. 터무니 없는 소리였지만 드디어 첫 발을!


오늘부터 12일까지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한다. 매년 500만명 넘게 찾아오는 국제적인 축제. 아침 아홉시 반에 종이에 이름을 적고 추첨하면 장소와 시간이 무작위로 정해진다! 언제 어디서 할 지 모르는 것이 더 심장을 쫄깃하게 하는 공정한 룰.


차가 다닐 수 없어 10kg가 넘는 재료 캐리어를 끌고 오르막 내리막을 수 없이 걸어 공연 장소에 도착한다. 옷이며 손이며 덕지덕지 물감 묻어 버려도 좋다.


말도 안되게 새파란 하늘 아래 무궁화를 꽃 피우고 당당히 눌러 적은 대한민국. 국뽕이라 해도 좋다. 
지금 여긴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다.


*fringe street event /9당일 아침마다 자리 투표를 해서 시간과 장소 선정을 한다.)












<웰컴대학로>


에든버러에서 한국의 웰컴 대학로 페스티벌을 알리는 퍼포먼스를 한다. 애초에 여기 오게 된 건 이 페스티벌을 홍보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디자인했던 타이틀을 그대로 퍼포밍 했다.

Welcome DAEHAKRO
한국의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꿈꾼다.


SBS 뉴스팀에서 찍어갔다. 가끔 티브이에 한 번씩 나오면 집안에 경사라도 난 듯 가족들이 기뻐하는데 타국에서의 활동이 뉴스에 나간다니 의미 있어 좋았다.


타국에 나와 혼자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평소에 누리던 주변의 많은 배려와 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집에 갈 때 에든버러 길가에 깔린 20파운드짜리 스코틀랜드 캐시미어 목도리 몇 개 사 가야겠다.











<에든버러 일기>

1. 여기 사람들은 옷깃만 닿아도 쒀어리 한다. 굉장히 친절하고 상냥해서 고맙다. 상점이나 호텔 프런트나 공연 지킴이나 한결같이 상냥하고 친절하다. 심지어 길에서 헤매거나 곤란한 상황에서는 어디서 불쑥 나타나 어려움을 해결해준다. 금발에 푸른 눈도 아름다운데 친절하기까지 하니 황송한 느낌이다. 팔 다리도 길쭉 길쭉 하고 정말 다른 생김들을 관찰하는 일이 재밌다. 말투뿐만 아니라 표정이나 제스처가 친절하고 이쁘다. 칭찬도 불쑥 불쑥 길에서 만났는데 한복이 이쁘다며 코리안이냐며 눈을 빛내며 말 걸어온다. 여기 며칠 있으니 덩달아 친절하고 상냥해지는 것 같다.

2. 밤 10시가 되어도 해가 안 진다. 이게 진짜 신기했는데 지금 이걸 쓰는 시간이 밤 9시 20분인데 하늘이 아직도 밝다. 낮이 기니까 시간을 버는 느낌이다. 

3. 조성진 공연을 봤다. 한국에서는 티켓팅 자체가 어려울텐데 에딘버러에서는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로 보니 현장감을 무시할 수 없는데 가깝지 않아서 디테일한 표정이나 움직임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끝나기 10분 전쯤 뒷좌석 할아버지는 코를 골더라. 앙코르로 가벼운 곡을 연주했고 특유의 살짝 긴 머리카락을 인사할 때 반동으로 바짝 들어 세우는 모습이 좋다. 타국에서 만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고결해 보인다. 퍼포먼스 하던 종이에 크게 적어 선물로 드렸다.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조성진, 당신이 참 자랑스럽습니다.'라고 


4. 영국 음식은 피쉬앤칩스가 유명하다. 아니 그것밖에 없다. 고칼로리 탄수화물 튀김 음식이라 많이 먹을 수는 없지만 자꾸만 손이 간다. 두툼하게 썬 감자 그리고 부드러운 흰 살 생선 튀김 조합 말해서 뭐해 당연히 맛있지 뭐. 두 번 먹었다. 개인적으로는 인도 음식집에서 먹은 난과 커리가 가장 맛있었고 이태리 음식도 수준급 맘에 들었다. 지중해 요리도 훌륭했고. 오늘 점심엔 멕시칸을 먹었다. 작은 도시에서 수준급의 세계 미식을 즐기고 누릴 수 있다. 




5. 작고 예쁜 가게들이 오밀 조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간판이며 타이포며 디스플레이까지 어쩜 다들 이렇게나 아름다운 건지. 이래서 유럽 유럽 하나보다. 다만 옛 건물들이라 주차장이 없다. 그래서일까 도심에 차도 별로 없다.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이다. 가치가 보존된 볼수록 다닐수록 아름다운 온고지신의 도시 같다.

6. 횡단보도나 주차선이 흐리거나 거의 없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래서 길이 까맣고 깨끗해 보인다. 거리엔 쓰레기 하나 없다.

7. 에든버러에 가장 많은 기념품은 캐시미어다. 거리엔 한 집 건너 한 집이 캐시미어 파는 집이다. 스코티시 체크무늬 목도리는 색깔부터 가격까지 천차만별 현지 한국인에게 정보를 얻어 도매 집을 알아내 몇 개를 싸게 샀다. 날씨 정보를 착각해 죄다 여름 옷만 싸와서 캐시미어 카디건을 하나 샀다. 입자마자 포근함의 극치다. 마치 누가 안아주는 듯한 부드럽고 안락한 느낌에 황홀하다. 이래서 캐시미어 캐시미어 하는구나.

8. 차비 아끼려고 걸어 다녔다기보다 걷기 좋은 도시다. 웬만한 곳은 걸어서 10분 20분이면 갈 수 있다. 물가는 비싸다. 런던에 비해 싸다고는 하는데 밥 한 끼 커피 한 잔 상점 물건 하나 살 때마다 손 떨린다. 

9. 여행 아닌 여행이다. 일로 왔지만 지내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되는 이곳의 문화와 분위기 풍경은 보고 느낄 때마다 감동이다. 눈으로 직접 봐야 한다는 말을 비로소 실감한다. 내가 보는 실제가 사진에 안 담긴다. 실제를 보며 감탄하다가 카메라를 켜 화면에 담는 순간 하찮아진다. 작고 비루해진다. 압도하는 느낌이나 웅장함은 화면이 아닌 눈동자로 느끼고 공기나 습도가 피부에 닿아 전체의 분위기가 순간으로 담긴다. 

에든버러에 온지 3일.
이곳은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상냥한 도시다.










<에든버러 일기2>

공연 시작 전 귀여운 아이들이 페인팅~ 페인팅하면서 걸어 나와 앞에서 푸른 눈을 빛낸다. 천사의 얼굴이다. 그림 같은 어린아이들의 얼굴. 보드랍고 사랑스럽다.
가지고 온 물감과 먹물 그리고 종이를 거의 다 썼다. DHL로 미리 잔뜩 싸서 보내두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공연을 하다 보니 모든 재료가 금세 바닥나더라. 
근처 화방을 검색해서 적당한 워터컬러 물감과 종이를 샀다. 쬐끄만한 물감 하나가 얼마나 비싼지 두 개 집었다가 하나는 내려놨다. 아 맞다 여기 영국이지. 종이도 질은 좋은데 역시 비싸다. 비교적 저렴한 한국의 물가가 그립다. 얼추 비슷한 재료를 구성했고 공연은 무사히 마쳤다.
큰 꽃을 그린 첫 번째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찾아왔다. 이 작품을 사고 싶어요 얼마일까요~? 사실 공연마다 작품을 관리할 수 없어 버리고 넘겼는데 누군가 나의 작품을 사고 싶어 한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했다.
오늘 하루 네 번의 공연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넋빠진 얼굴로 짐 챙겨 숙소로 걷는다. 붓과 재료를 담은 캐리어가 얼룩덜룩 너덜너덜 해져 그 안의 재료가 이리저리 뒤엉켜 엉망인 모습을 보면서도 정리할 에너지가 없다. 

에든버러에 온 지 6일째, 나는 얼만큼 성장했을까.



<에든버러 일기 3>

1. 물맛이 좋다. 물에 무슨 맛이 있나 싶겠지만 맛이 있다. 특히 여기 물은 유리병에 담아 팔만큼 비싼데 비싼 물은 향이며 맛이며 분명 부드럽고 깔끔한 디테일과 한 끗이 있다. 다른 건 다 비싸도 에비앙은 1파운드 밖에 안 해서 실컷 사 마신다. 물을 정제하고 거르는 기술이 뛰어나 맛이 좋은 건지 아님 원래 이곳의 물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



2. 슈퍼마켓에서 파는 티라미수는 고급 디저트 전문점 이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디저트의 수준이 뛰어나다. 1파운드짜리 케이크에 세상 다 가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마리 앙투와네트가 프랑스 국민이 굶주림에 시달릴 때 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으라 해서 욕을 먹었는데 우습게도 그 말이 설득력을 가질 만큼 케이크가 싸고 맛있다. 

3. 퍼지류 디저트를 원래도 좋아하는데 이곳의 퍼지는 극강의 부드러움과 달콤함을 가졌다. 쫀득하면서 달달한데 이에 끼지 않고 녹아내린다.

4. 밖에서 사 먹는 것과 재료를 사서 해먹는 것의 비용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일식이 흔하다. 호텔 근처 벤또야에 자주 갔는데 간단히 먹어도 2만 원이 훌쩍 넘는다.

5. 바질 페스토와 새우 그리고 바게트로 오픈 샌드위치를 해먹었다. 훌륭하다. 포트와인 한 병 사서 숙소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 주변을 걷는다.

6. 여기 도착하고 내내 흔하지 않게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매일 하늘은 마치 보정한 것처럼 선명하고 푸르다. 구름은 합성한 것 같이 드라마틱 하고. 테라스에 모여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와인 한 잔 맥주 한잔하면서 긴 낮을 누리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표정과 행복한 느긋함이 내게도 옮아 테라스를 떠나지 못하겠다.

5. 곳곳에 정원을 잘 가꾼다.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정원 양식 구성이나 분위기가 익숙해서 신기했다. 이곳 특유의 온화한 색감이 있다.

6. 에든버러는 특히 걷기 좋은 도시다. 이 작은 도시에 깃든 웅장함은 특별하다. 작고 예쁜 가게들은 차 타고 지나치기엔 아깝다. 걷는 속도에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 디테일이 즐겁다.

7. 스코틀랜드 국립 박물관에 가보니 영국의 왜 강대국인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발명하고 시작했는지 알 수 있다. 기원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볼 수 있는데 여기 사람들은 조선 중기 때 이미 카메라로 얼굴 찍고 기차 타고 다녔다. 

8. 공부하러 온 한인들이 많다. 대부분 만난 한국인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분야는 모두 달랐지만 여기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9. 해가 좋으면 곳곳의 공원에 돗자리도 없이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평화로운 공원 풍경은 여지없이 한 폭의 그림 같다.

10. 레스토랑에서 스타터로 나오는 씨 바른 절인 올리브가 참 맛있다. 바게트에 발사믹 찍어 먹으면 궁합 좋다.



11. 고등어회와 굴 요리가 일품. 여긴 바닷가라서 해산물이 유독 좋다. 풍미가 있다.

12. 스코틀랜드에 반한 것 같다.













<에든버러에 뿌린 씨앗>


짧은 시간이었지만 에든버러 현지 학생들에게 캘리그래피를 틈틈이 가르쳐줬었다. 한국을 좋아하고 한글을 아는 학생들이라 쉽게 배우고 따라 하며 즐겼다. 


잉크 리필 교체가 가능한 쿠레타케 붓펜과 여러 가지 크기의 붓, 색색의 동양화 물감을 선물했다. 즉석에서 자음과 모음을 그려 간단한 교본을 만들어 짧은 강의도 곁들였다. 


기본적으로 한국을 좋아하고 한글을 누가 만들었는지나 한글의 원리는 이미 알고 있는 학생들이라 캘리그래피의 재미와 기술만 알려주면 됐다. 더불어 행사 내내 그린 무궁화 꽃 그리는 방법도 속성으로 알려줬다. 


간단한 샘플 몇 가지를 만들어 앞에 두고 말했다. “여러분은 저의 에든버러 1호 제자입니다. 제가 여길 떠나더라도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붓으로 한글 이름을 써드리세요.” 그러자 학생들은 눈을 크게 뜨고 손사래를 쳤다. 간단한 이름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자신감을 심어주고 붓을 손에 쥐여줬다.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을까. 어제 새벽 한시 반쯤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가 도착했다. 엘리자베스 초상화같이 생긴 카라와 한복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케티였다.


열심히 꽃을 그리고 한글 이름을 쓰는데 열중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한글 캘리그래피를 알려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한국 홍보관에 찾아오는 손님들께 서툴지만 한글을 써서 선물하고 있었다. 귀엽고 예쁜 사람들. 사실 외국인들이 볼 땐 서툰 한글도 무척 신기할 것이다. 


어설프지만 정성 가득한 모양이었다. 잠들기 직전 받은 메시지에 놀라움 반 뿌듯함 반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머물던 며칠간 재료 몇 가지에 연습할 샘플이랑 간단한 설명을 곁들인 짧은 시간은 그들에게 씨앗이었다. 


좋은 흙에 씨앗을 뿌렸다. 먼 타국에서 돋아나는 초록 들이 뭉클하다. 한국에 오면 글씨당에 초대하기로 했는데 벌써 그 시간이 코앞에 닥친 것처럼 심장이 두근댄다.










<에딘버러 마지막 일기>


뮌헨을 경유해 돌아오는 열 네 시간 비행 내내 긴 잠을 잤다. 그래서일까 마치 꿈을 꾼 것 같다.
인천에 도착해서 탁한 하늘을 보니 아 내가 정말 돌아왔구나 실감한다. 사진첩을 열어 말도 안 되는 풍경을 다시 꺼내보며 며칠간 휘몰아쳤던 기억을 정리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영화관에서 해리 포터를 봤었다. 그게 내가 극장에서 본 첫 영화였다. 에든버러 로열마일을 수없이 걸으며 걸음마다 영화의 장면을 떠올렸다. 지나는 사람들 모두 캐릭터처럼 느껴지는 곳. 에든버러에서 내내 들뜬 기분이 들었던 것은 마치 어릴 적 영화관에서 봤던 장면 속에 있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해리 포터의 마법사처럼 마술을 부리지는 못했지만 붓 들고 신나게 나를 펼쳤던 시간. 사실 이곳에서 붓을 든 순간부터 이미 나에겐 마법처럼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첫날 애국가와 무궁화를 공연으로 펼쳤던 것을 시작으로 총 일곱 번의 공연을 했고. 한글로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써주며 그린 꽃이 이 백 송이다. 시간과 정성은 들인만큼 티가 나고 좋게 남는다.


마지막 날 현지 학생들에게 캘리그래피를 가르쳐주며 시간을 마무리했다. 바리바리 챙겨간 재료들은 모두 선물로 나눠줬다. 헤어지는 시간 학생들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촉촉함이 고맙고 아쉽다. 짧은 시간이지만 촘촘했고 밀도 높았다.


이곳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의 친절과 사랑, 함께 보낸 의미 있고 가치 있던 시간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짙게 기억될 것 같다. 이제 마법에서 깨어날 시간. 즐겁고 행복했다.


2022년 8월 아름다운 도시 에든버러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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