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카타르 일기> 2022

2022/11/20~26


카타르 일기

모래가 섞인 바람, 습한 공기, 몇 백 년 된 울창한 야자수가 흔한 길거리. 그을린 사람들의 낯빛이 이곳이 중동임을 상기시킨다. 중동은 태어나 처음인데 이국적인 생경함이 여행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미지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긴 비행의 수고가 아깝지 않은 새로움이다. 친절한 미소와 태도로 맞아주는 공항의 사람들은 기대에 없던 터라 고맙다. 덕분에 장시간 밤 비행에서 누적된 피로감이 녹았다. 택시를 몰거나 외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남아시아 사람들이고 새하얀 옷을 입은 이들이 이 땅의 주인들이다.


숙소로 향하는 잘 닦인 도로를 달리며 창밖으로 보이는 그림 같은 풍경을 감상한다. 지어진 건물들의 표면은 고운 모래처럼 밀도가 촘촘하고 부드러워 보인다. 잔디 구장이나 공원 주변에 한 그루의 나무마저 존재하는 모든 요소는 철저히 아름답고 정갈하지만 어쩐지 인위적이다. 비행기에서 내려서부터 트램을 타고 택시를 타기까지 뭐랄까 기름기가 줄줄 흐른다. 설비나 시설 마주하는 조형물이나 건축 마감재 미디어 연출이 세심하고 돈 깨나 쓴 느낌이다. 듣자하니 300조를 썼다던데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몸소 경험한다. 심지어 일하는 사람들의 의복에서도 부유함이 흐르니 그런 기분이 들도록 의도했다면 성공했다고 본다. 월드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가 돈쓰고 땀 내고 힘썼을지 안 보고 안 들어도 훤히 알겠다. 색색의 응원단 뜨거운 태양 아래 세계의 모든 피부색이 넘실거리는 지금, 이곳은 카타르다.









카타르 일기 2

응급실에 입원했다. 첫날부터 시차 적응을 못해 잠을 못 잔 상태에서 야외 공연에 바닷바람을 몇 시간 세게 맞았더니 몸살에 위장병까지 겹쳐 아침부터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설사에 두통까지 겹쳐 도저히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혈압이 95/55까지 떨어져 어지럼이 심했다. 수액 세 번 항생제 멀미 두통 주사액을 여섯 시간에 걸쳐 링거로 맞고 저녁이 돼서야 정신이 들었다. 혈압이 오르지 않아 도저히 퇴원을 못하다가 11시가 되어서야 정상 범위에 들어와 의사의 소견을 받고 퇴원했다. 출국 전부터 카타르에 도착한 지금까지 준비하는 내내 정신적 육체적으로 부담이 컸나 보다. 


내일부턴 기운 차리고 다시 글씨도 쓰고 공연도 해야 할 텐데. 우선 내가 없는 빈자리를 채워 몇 배로 더 힘을 들여야 하는 팀원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하야카드가 있으니 병원비가 무료였다. 약값도 무료다. 물론 대기시간이 엄청나게 길다는 단점이 있으나 시설이나 서비스는 좋았다. 타국에서 아파보니 유독 더 힘들다. 다들 잘 보살펴줬지만 한국의 가족들이 참 보고 싶다.











카타르 일기 3

아팠던 이틀이 지나고 기운을 차렸다. 카타르 한인회 회장님댁에서 머무는 중인데 사모님이 된장국도 끓여주시고 꿀물도 타주시고 정성으로 돌봐주셨다. 아무래도 모래가 많은 곳이라 늘 목이 칼칼하다. 일교차가 심해서 늘 겉옷을 챙겨야 하고. 한 시간 정도 이름 써주는 이벤트를 했는데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다. 눈에 띄는 이곳의 특징이 있었는데 정말 몇몇 사람을 빼고는 종이 한 장에 자신과 자신의 가족 이름 전부를 써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종이에 그 긴 이름들을 적느라 애먹었다. 공연을 마친 뒤 사진 찍자고 걸음마다 요청해서 차까지 가는 데만 몇 십 분이 걸린다. 공연은 감사하게도 매번 성공적이고 반응이 좋다. 뿌듯하고 행복한 하루. 더없이 소중한 시간. 아파보니 숨 쉬는 것부터 한 걸음걸음까지 감사하게 된다. 매일이 설렌다. 내일이 기대된다.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H조 대한민국-우루과이 첫 경기를 응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무승부와 1패를 지나 어제 포르투갈과의 경기 역전 승리로 기적처럼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했다. 사실 나에게 축구는 어릴 때 2002월드컵 이후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남자들의 스포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땐 초등학생이었고 Be the Reds 티셔츠를 입고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떼로 몰려 큰 화면 앞에서 응원을 하던 기억이 전부다. 전국민적 신드롬을 일으킨 20년 전 그때 이후 처음이다 이런 설렘과 신남은. 캘리그래피 공연 행사로 카타르에 가게 되어 얼결에 경기장까지 가서 응원을 하러 가게 된 일이 월드컵 몰입에 큰 계기가 되었다. 실제 축구 경기를 관중이 되어 실시간으로 직관한 것이 인생 처음이었다. 경기장으로 가는 길 내내 붉은 악마들의 뜨거운 응원 그들의 열정과 투지가 티브이 속에서 보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게이트를 지나 관중석으로 들어서는 순간에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360도로 펼쳐지는 푸른 잔디 구장과 빽빽한 관중석 박수와 함성소리는 잠잠하던 신체 오감을 일순간에 번쩍 깨웠다. 동공은 커졌고 귀는 뚫리고 심장이 요동치면서 머리카락은 쭈뼛 섰다. 현란한 전광판 선수들과 관계자들 공 차고 몸 푸는 모습들을 보니 나도 마치 뛰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래서 여기까지 이걸 보러 오는구나..! 사실 잘 이해가 안 됐었다. 티브이로 중계되는 것을 보는 게 훨씬 편하고 좋을 텐데 왜 시간들여 비행기를 타고 가서 고생을 하며 직관을 하는 건지. 


거리에서 제일 큰 소리로 응원하는 목이 쉰 공룡 인형을 입은 붉은 악마에게 물어봤다. 혹시 어디에서 지원해주나요? 사비 들여 비행기 타고 티켓 사고 숙박 하고 하는 모든 비용을 본인이 내면서 저렇게 까지 고생할 일인가 싶어서. 대답은 이랬다. 지원같은 건 없다고. 자신들은 월드컵을 직접 보러 가려고 다섯명이 1년 전부터 다달이 돈을 모아 예매부터 모든 비용을 충당했다고. 일행들은 남아공 월드컵때부터 함께 다닌다고 한다. 붉은악마 커뮤니티는 굉장히 체계적이고 촘촘했다. 고생이라는 생각 그건 실제 직관을 해보지 않은 사람의 좁은 짐작일 뿐이었다. 경험해 보니 이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이분들의 얼굴엔 붉은 생기가 가득했다. 평생 경기장에서 축구 경기도 한번 못 보고 직관의 기쁨을 모르고 살 뻔했다. 전반은 눈 깜짝하는 새 끝나버렸고 후반도 그랬다. 마치 경기장의 시계는 더 빠른 것 같았다. 경기장이라는 공간은 경기 내내 선수들과 관중들과 함께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살아있었다. 그만큼 박진감이 넘쳤다. 그런 의미로 이번 포르투갈 전을 경기장에서 직관한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 월드컵 반전 드라마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며 함성 지르며 응원한 붉은 악마들 덕분에 선수들이 더욱 힘났을거다.


대한민국 16강 진출! 자랑스럽다.

정말 행복한 일이다. 대한민국 만세!







카타르 대사관 현판 선물

무한대의 연결을 상징하는 엠블럼을 글씨에 녹였다.

‘카타르 대사관’

FIFA는 "이번 디자인은 대회의 비전 '전 세계의 연결'이 녹아들었다"면서 "축구를 형상화했으며 아랍 문화의 특징을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엠블럼은 무한대(Infinity) 기호인 '∞'를 세로로 세우는 동시에 대회가 열리는 8개의 경기장을 표현했다. 모든 것이 이어진다는 대회의 본질까지 담아낸 것. 그리고 엠블럼에 새겨진 패턴, 위쪽의 공 문양과 두 개의 점, 하단의 'Qatar2022' 글씨체 등을 미뤄봤을 때 아랍 전통문화 요소가 곳곳에 묻어났다.







카타르 마지막 일기

카타르 사람들의 이름도 한글로 잔뜩 써줬다. 한글로 된 자신의 이름을 받고 활짝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든 피로가 녹는 느낌이다. 상해-뉴욕-에딘버러-쿠알라룸푸르-도하까지. (중국-미국-영국-말레이시아-카타르)

이제 지구 반바퀴 정도는 돌았으려나. 지금까지 써 준 이름들이 전 세계에 몇 명쯤 될까. 이번 여정은 참 고되기도 하고 끈끈하기도 했다. 여태까지 다녀본 곳 중 가장 사람들의 밀도가 높았고 그래서 매우 바쁘게 모든 것이 진행됐다. 일주일 사이에 우리 팀은 공연을 열두 번 했다. 현지 사정에 맞게 동선도 바꾸고 안무도 수정하면서 다듬었고 덕분에 할수록 나아지고 발전되는 것을 느낀다. 월드컵이 열리는 카타르에서는 모든 게 비싸고 어렵다. 그래서인지 팀원들과 낯선 땅에서 더욱 끈끈해졌다. 특히 유독 이번에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무리한 일정에 응급실 실려 간 것은 물론 이틀에 한 번은 코피가 터졌다. 


그 와중에도 매일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밝게 웃으며 사람들을 만나야 하니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더라. 매일 나가기 전 화장실 거울을 보며 손가락으로 입을 찢어 웃는 연습을 했다. 이곳에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눈 깜빡하니 돌아가는 비행기 타러 공항 체크인 중이다. 짐을 부치고 전 세계 어딜 가나 바닥 타일이 같은 스타벅스 귀퉁이에 앉아 라테를 마시면서 일기를 쓴다. 사실 여기까지 와서 사막도 한 번 가보고 싶었고 주변 구경도 하고 싶었는데 하루하루 준비하느라 그럴 짬이나 여유가 전혀 없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 본다. 카타르라는 낯선 나라에 와서 내 나라의 글씨를 쓰고 보여줄 수 있어 기쁘고 뭉클했다. 열두 번을 공연하며 매 순간이 그랬다. 


나는 어디쯤 왔을까.

신기루에 닿을 수 없을지라도 신기루를 사랑하며 살고 싶다.